PEF 시장, 100조원 육박 고공 행진
투자 집행·엑시트도 ‘사상 최대치’
풍부한 현금 동원력·적극적 M&A 행보 눈길
기업 가치 올려 환골탈태 이끄는 해결사 역할 부각

[스페셜 리포트]
투기 자본 ‘눈총’ 받던 사모펀드, M&A 시장 큰손 됐다
‘한샘·남양유업·한온시스템·요기요·W컨셉….’

최근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기업들로 모두 경영 참여형 사모펀드(PEF)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으로 기업들이 M&A에 소극적인 틈을 타 PEF가 ‘빅딜’을 주도하며 시장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경영 참여형 사모펀드(PEF)가 굴리는 자금이 100조원에 육박하며 한국 인수·합병(M&A) 시장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PEF는 2015년 사모펀드 제도 개편 이후 양적 성장을 꾸준히 이어 가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2020년 PEF 동향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투자자가 PEF에 출자를 약정한 금액은 97조1000억원으로, 2015년보다 1.7배 늘었다. 출자를 이행한 금액은 같은 기간 1.8배 증가한 70조6000억원이었다. 2020년 운영 중인 PEF는 855개로 전년(721개)보다 134개 늘었다. 총투자 집행 규모는 18조1000억원으로 4년 연속 증가 추세다.

과거에는 PEF에 ‘투기 자본’이라는 부정적인 꼬리표가 따라붙었지만 최근에는 위상이 달라졌다는 평가다. 지난해 IMM인베스트먼트가 PEF 운용사 가운데 유일하게 공시 대상 기업집단(자산 5조원 이상)에 포함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PEF가 가업 승계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의 구세주로 등판하며 기업 경영의 해결사로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부실기업을 인수해 매출과 기업 가치를 끌어올려 알짜 기업 상태로 엑시트(투자금 회수)하는 사례가 늘면서 M&A 시장에서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이다.

한계 기업뿐만 아니라 신사업 투자 등 자금 조달이 필요한 기업들도 PEF로부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다. 최근 주목할 만한 인수 사례를 통해 PEF의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전략과 자본 시장에서의 역할을 살펴봤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그래픽=전어진 기자
① 가업 승계의 고민 해결사

한국은 높은 상속세 부담 등 가업 승계와 관련한 규제 강화로 가업 상속 요건이 까다로운 편이다. 중견기업연합회의 2019년 중견기업 실태 조사에 따르면 가업 승계 애로 사항 중 상속·증여세 등 조세 부담(78.3%)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승계 시 한국의 상속세 최고 세율은 60%로 미국·영국(40%), 프랑스(45%), 독일(30%)보다 훨씬 높다. 중소기업의 가업 승계를 지원하기 위해 1987년 도입한 가업상속공제가 있지만 까다로운 적용 요건 때문에 활용하기가 어려워 실제 혜택을 받은 기업은 최근 5년(2015~2019년) 평균 85건에 불과하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한국의 대주주에 대한 높은 상속세 누진세율을 고려하면 기업 오너에게는 가업 상속보다 PEF가 더 유리한 대안으로 부각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한국 가구업계 1위 한샘은 PEF인 IMM프라이빗에쿼티(PE)에 경영권을 매각하기로 했다. 매각 이유는 기업을 승계할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다. 한샘 창업자인 조창걸 명예회장은 1939년생으로 슬하에 1남 3녀를 뒀지만 장남이 2012년 사망했고 남은 세 딸도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샘이 1994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코로나19로 인테리어와 리모델링 수요가 높아지면서 지금이 최고점 매각을 노릴 수 있는 적기이기 때문에 매각을 결정했다고 본다. 50%에 이르는 증여세도 매각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매각 대상 지분은 조 명예회장과 특수관계인 지분을 포함한 약 30.21%다. 최대 주주인 조 명예회장의 지분(15.45%), 특수관계인(14.74%), 테톤캐피탈파트너스(8.43%), 국민연금(6.92%), 기타(54.46%) 등으로 이뤄져 있다.

업계에선 매각 가격을 1조원대 중반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샘 측은 “IMM PE를 경영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장기적인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파트너로 판단해 지분 양수도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면서 “보유 지분 매각을 통해 태재재단(구 한샘드뷰연구재단) 등 공익 사업을 본격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 명예회장이 IMM PE를 한샘의 새 주인으로 선택한 이유는 IMM PE가 온라인 가구 전문 회사 오하임아이엔티를 보유하고 있어 한샘과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또 유동성이 풍부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거래 상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M&A는 보안이 지켜지지 않으면 주가 변동과 그로 인한 거래소 조회 공시 요구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보안 유지가 중요한데 PE는 투자 과정에서 소수가 신속한 의사 결정과 보안 유지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마포구 한샘 상암 사옥  /한샘 제공
서울 마포구 한샘 상암 사옥 /한샘 제공
한국 PEF 운용사인 한앤컴퍼니를 새 주인으로 맞은 남양유업도 비슷하다. 2013년 대리점 갑질 사건 이후 온갖 구설과 지속적인 불매 운동에 시달려 온 남양유업은 올해 4월 ‘불가리스 사태’로 기업 이미지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자 오너 일가가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경영에서 손을 뗐다.

당초 남양유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과 실적 부진으로 인수자를 찾는 데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이때 한앤컴퍼니가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한앤컴퍼니는 홍원식 전 회장의 지분 51.68%를 포함한 오너 일가 지분 53.08%를 3107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한앤컴퍼니는 남양유업에 한국 최초로 투자회사에 적용한 집행임원제도를 도입해 투명한 경영과 관리, 감시 기능을 강화할 계획이다. 집행 임원제도는 집행 임원이 이사회로부터 업무에 관한 의사 결정권과 집행권을 위임받아 이를 결정·집행(경영)하고 이사회는 집행 임원의 이러한 결정과 집행을 감독하는 시스템으로 지배 구조 개선과 경영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그래픽=전어진 기자
② 신사업 자금줄 역할

기업들이 신사업 투자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비주력 사업을 매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한국 PEF 운용사 제이앤프라이빗에쿼티(PE)에 자회사 현대오일터미널의 지분을 매각하는 안건을 최근 이사회에서 의결했다.

양측이 평가한 현대오일터미널의 시장 가치는 총 2000억원으로 현대오일뱅크는 8월 말까지 전체 지분의 90%를 제이앤PE에 매각한다. 잔여 지분(10%)은 지속 보유할 예정이다. 현대오일뱅크는 3월 현재 85% 수준인 정유 사업 매출 비율을 2030년까지 45%로 낮추고 화이트 바이오, 친환경 화학 소재, 블루 수소 등 3대 친환경 미래 사업의 영업 비율을 70%까지 높이는 ‘비전 2030’을 발표했다. 현대오일터미널 매각 대금은 친환경 미래 사업에 투자할 방침이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4월 윤활유 자회사인 SK루브리컨츠 지분 40%를 한국 PEF 운용사 IMM PE의 자회사 IMM 크레딧솔루션에 매각했다. 양 사는 SK루브리컨츠의 기업 가치를 3조3000억원으로 평가하고 부채 등을 차감해 SK루브리컨츠 지분 40%에 대한 매각 대금을 1조1000억원 수준으로 확정했다.

SK루브리컨츠는 글로벌 윤활기유·윤활유 시장점유율 1위로 2020년 매출 2조6879억원, 영업이익 2622억원을 올린 알짜 자회사다. 기존 정유·화학 사업에서 전기차 배터리 등 친환경 사업으로 체질 전환에 박차를 가하는 SK이노베이션은 2015년부터 SK루브리컨츠 매각을 검토해 왔다.

SK이노베이션은 SK루브리컨츠 경영권을 유지한 상황에서 IMM PE를 2대 주주로 맞으며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게 됐다. 매각 자금은 향후 SK이노베이션이 추진하는 배터리 등 친환경 신사업에 사용될 전망이다.

현대중공업지주는 미래 사업 투자를 위해 자회사 현대글로벌서비스의 지분 38%를 미국계 PEF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에 매각해 주식 매각 대금 6534억원을 확보했다. 이는 올해 2월 양 사가 체결한 사전투자유치(프리 IPO) 계약에 따른 것이다.

이번 거래로 KKR은 현대글로벌서비스의 2대 주주가 됐다. 현대중공업지주는 매각 대금을 토대로 현재 미래 사업으로 추진 중인 로봇·인공지능(AI)·수소 등에 투자할 계획이다. 이뿐만 아니라 대우조선해양 인수와 두산인프라코어 인수 대금에도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강남구 남양유업 본사  /한국경제신문
서울 강남구 남양유업 본사 /한국경제신문
③ 코로나19발 산업 재편, 구조 조정 승부사

코로나19가 부른 산업계 구조 조정은 PEF에 좋은 매물을 헐값에 살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 줬다. 2020년 경영 정상화를 위해 두산그룹이 3조원 규모의 자구안을 이행하며 클럽모우CC·두산솔루스·모트롤BG·두산인프라코어 등 핵심 계열사를 매각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한항공의 기내식·기내면세품 판매 사업도 마찬가지다. 대한항공의 기내식사업부는 코로나19 이전 연평균 매출 3500억원, 영업이익 300억원을 내던 알짜 사업이었다. 대한항공이 코로나19 장기화에 대비해 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자산 매각에 속도를 내면서 시장에 매물로 나오자 한앤컴퍼니가 9906억원에 인수했다.

한앤컴퍼니는 대한항공 측과 30년간 독점 계약을 하고 기내식 사업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로 한앤컴퍼니가 반사 이익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그래픽=전어진 기자
④ 밸류업 통한 기업 가치 연금술사

PEF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공적인 엑시트다. 한앤컴퍼니는 2014년 인수한 한온시스템 엑시트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앤컴퍼니는 2010년 설립 이후 25건의 경영권 인수를 진행했고 인수 후 투자 실패 사례가 한 건도 없다. 인수한 회사와 유사한 업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기업과 산업의 가치를 높이는 한상원 한앤컴퍼니 사장의 ‘볼트 온(bolt-on)’ 전략 덕분이다.

한앤컴퍼니는 2013년 웅진식품을 품고 제과 생산 업체 대영식품, 주스 전문 업체 동부팜가야를 추가로 인수해 5년 만에 기업 가치를 2배 이상 끌어올린 전력이 있다. 1150억원에 사온 웅진식품을 2018년 대만 퉁이그룹에 2600억원에 매각했다. 한앤컴퍼니가 현재 매각을 추진 중인 자동차 열 관리(공조) 시스템 2위 기업인 한온시스템도 볼트온 전략의 성공 사례다.

한온시스템은 2014년 한앤컴퍼니에 2조8000억원에 매각, 한앤컴퍼니의 볼트온 전략을 통해 7년 만에 몸값을 두 배 이상 끌어올리면서 올해 한국의 M&A 시장 최대어로 떠올랐다. 한앤컴퍼니는 한온시스템 인수 이후 세계 3위 자동차 부품 회사인 캐나다의 마그나인터내셔널의 유압제어사업부문을 약 1조4000억원에 사들여 밸류업을 시도했다.

이후 6년간 연구·개발(R&D) 비용으로 1조3500억원을 투입해 미래 친환경차 기술 경쟁력도 확보했다. 업계에서는 한온시스템의 매각가가 지분 69.99%와 경영권 프리미엄 등을 합해 7조~8조원에 형성될 것으로 전망한다. 7조~8조원대로 매각된다면 2015년 MBK파트너스가 7조2000억원에 인수했던 홈플러스를 제치고 한국 기업의 M&A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