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투자실탄 폭증에…정부 지원금도 귀찮아진 스타트업
입력 2021.05.18 07:00|수정 2021.05.20 10:19
    제출서류 많고 증빙 까다로운 정부 지원사업
    지원금 널렸지만..."귀찮아서 신청 안하기로"
    VC업계 역대급 유동성에 돈 받을 곳 많아져
    • "정부에서 스타트업 대상으로 나오는 고용 관련 지원금이 많이 있지만 신청하기 귀찮아서 계속 미루고 있다. 정부 관할기관에서 오히려 언제 서류를 제출할 거냐고 먼저 연락이 온다. 정부 자금을 받으면 여기저기 불려다닐 일이 많다 보니 우리뿐 아니라 다른 스타트업들도 지원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 IT 스타트업 공동창업자 -

      투자시장에 막대한 유동성이 풀리면서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 전략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엔 정부 및 공공자금이 거의 유일했지만 이제는 막대한 투자금을 업은 벤처캐피탈(VC)이 유력한 자금 조달원으로 떠올랐다. 제출서류가 많고 실사 부담이 큰 정부 사업은 오히려 '귀찮다'는 인식이 일반적이게 됐다.

      스타트업은 창업 3년 안에 성장 투자를 받지 못하면 폐업의 기로에 서는 경우가 많다. 아이템이 좋아도 경제성이 확인되지 않는 초기엔 자금을 조달하기 쉽지 않았다. 정부 부처로부터 창업지원금을 받거나 엔젤투자자를 주선받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스타트업이 정부의 눈에 들어도 자금을 받는 절차가 까다롭다. 보통 정부 지원 사업은 세금계산서, 용역계산서 등을 작성해 제출하면 기관 심사를 거쳐 며칠 뒤 통장으로 자금이 들어오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지원금에서 부가세 10%는 제한다.

      지원금은 '나랏돈'인 만큼 거의 국고에 준하는 집행 절차를 거친다. 1000만원 이상의 용역을 맡기려면 국가 기관들이 입찰하듯 업체들의 조건을 비교하고, 가장 비용이 적은 곳을 골랐다는 점까지 입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자금 사용 내역도 꼼꼼히 남겨야 한다. 사소한 문구류 구매도 승인을 받아야 하니 사업을 하는 건지 엑셀 서류작업을 하는 건지 헷갈린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지원 대상이 됐음에도 돈 한 푼 못받고 자본금만 까먹는 스타트업도 부지기수다.

      한 스타트업(교육관련 플랫폼)의 대표는 "기간 안에 정해진 지원금을 딱 맞춰 써야 하는 데다 인건비, 소모품비 등을 증빙하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수십가지에 달한다"며 "정부 지원금 만원이 귀한 스타트업도 있겠지만, 지원을 받기까지 과정이 매우 번거로운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부보다 VC로부터 자금을 받으려 하는 스타트업들이 늘고 있다. 보통 VC 투자는 한번 자금을 유치하면 다음 실사까지 1년여의 여유가 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 비교적 절차 부담이 덜하다.

      스타트업이 VC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은 몇년 새 시장의 유동성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타트업에 있어 VC는 '만나뵙기 어려운 곳'이란 인식이 강했다. 중소기업벤처부에 따르면 2017년까지 국내 벤처기업의 조달 자금 중 60.5%는 정책지원금이었다. 캐피탈 및 엔젤투자를 받은 경우는 0.1%에 그쳤다.

      그러나 몇 년 새 VC 업계에 막대한 유동성이 쏟아졌다. 정부 출자는 물론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키우는 VC도 크게 늘었다. 자금이 넘쳐나는 VC들은 더 많은 투자처가 필요해졌고, 스타트업에도 눈을 돌리게 됐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VC의 초기 투자 규모는 2017년 7796억원에서 지난해 1조3205억원으로 급증했다.

      스타트업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과거엔 데스밸리를 지나 성장 궤도에 진입해도 투자를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짧은 기간에 압축 성장하는 스타트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과거 하이퍼커넥트의 경우 창업 첫해부터 흑자를 냈는데, 그 후에 여러 차례 받은 투자금을 쓰지 않고도 결국 유니콘에 올랐다. 10건의 투자 중 하나만 크게 성공해도 되는 VC 입장에서 스타트업 투자가 나쁠 것이 없다.

      VC들의 곳간이 후해지니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금액도 정부 지원보다 큰 경우가 많아졌다. 잘 받은 벤처캐피탈(VC) 투자 한 건이면 정부 지원 열 건이 부럽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VC는 투자를 하기 때문에 '한번 주면 끝나는' 정부보다는 스타트업 관리에 공을 들이기도 한다.

      대기업 CVC 투자심사역은 "정부의 스타트업 지원금은 대부분 인건비 형태로 나오는데, 자금 지원과 동시에 '고용창출'이라는 목적이 달성된다"며 "VC 지원은 투자인 만큼 사후관리에 보다 신경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