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의 뉴욕증시 상장으로 국내 차등의결권 도입이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유니콘들에게 경영권 보호 혜택만 주는 허울뿐인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쿠팡의 뉴욕증시 상장으로 국내 차등의결권 도입이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유니콘들에게 경영권 보호 혜택만 주는 허울뿐인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쿠팡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추진하면서 차등의결권 국내 도입이 급물살을 타는 분위기다. 쿠팡이 활동무대인 한국이 아닌 미국을 상장 목적지로 선택하자 하루빨리 벤처혁신기업에 한해 차등의결권을 허용해야 한다는 정부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차등의결권 도입은 도피성 상장을 할 가능성이 있는 벤처기업의 경영권만 보호해주는 허울뿐인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술혁신이 아닌 단순 플랫폼식 경영으로 성장한 벤처기업에 대한 차등의결권 허용은 과도한 경영권 보호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차등의결권 도입 급물살

쿠팡은 이달 초 NYSE에 상장신고서를 냈다며 뉴욕증시 상장을 공식화했다. 상장 회사는 국내회사인 쿠팡㈜이 아닌 지주회사격인 미국회사 쿠팡LLC다. 사업회사인 국내 쿠팡은 미국 쿠팡LLC의 100% 비상장 자회사다. 이에 업계는 쿠팡 상장을 두고 ‘미국기업이 미국에 상장했을 뿐’이라는 시각을 보낸다. 반드시 차등의결권 때문에 미국 상장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쿠팡 초기 투자자인 김한준 알토스벤처스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기업들이 차등의결권 때문에 어떤 증시에 상장할 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며 쿠팡이 뉴욕증시 상장을 선택한 것은 더 높은 기업가치를 고려했기 때문이다는 해석을 내놨다. 

하지만 국내에선 쿠팡이 상장 목적지로 한국이 아닌 미국을 선택했다는 사실보다 차등의결권 도입에 관한 이슈가 더 확산되는 모양새다. 차등의결권은 말 그대로 의결권에 차등을 두는 제도다. 창업주나 최고경영자(CEO)가 가진 주식에 보통주보다 큰 힘을 부여해 경영권 방어 측면에서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

쿠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상장신고서를 보면 김범석 쿠팡 의장의 주식 1주는 29주의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 때문에 쿠팡이 한국이 아닌 미국 상장을 추진했다는 여론이 불거지며 정부가 차등의결권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곧 도입한다는 ‘차등의결권’… 쿠팡을 잡을 수 있었을까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하태경 의원(국민의힘·부산 해운대구갑)은 “쿠팡이 한국을 버리고 미국에 상장한 것은 차등의결권이 한국에는 없고 미국에는 있기 때문”이라며 “키워놓으니 기업 뺏긴다면 누가 기업을 하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지금이라도 창업자 경영권 보호와 자금 유치를 활성화해 비상장 벤처기업의 ‘K-유니콘’(1조원 가치 지닌 비상장기업)화를 이끌고 이들 기업의 국내 상장까지 유도해야 한다는 얘기다.

관련 개정안은 국회를 곧 통과할 분위기다. 여당은 비상장 벤처기업의 차등의결권 도입을 골자로 하는 벤처기업법 개정안을 2월23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상정했다. 야당에서도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한 상태여서 관련 개정안은 빠르면 다음달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차등의결권 있으면 국내 상장?

하지만 차등의결권이 도입되더라도 K-유니콘이 국내 상장을 선택할지는 의문이다. 스타트업 전문 조사기관 더브이씨에 따르면 K-유니콘 기업 11곳(2019년 기준)이 2020년 6월까지 유치한 투자자금(약 10조7127억원) 중 미국·중국·일본·독일·싱가포르 등 해외 자본이 10조1935억원으로 전체의 95%가량을 차지했다.

글로벌 투자자문사는 쿠팡의 미국 증시 상장으로 기업가치가 최대 55조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K-유니콘의 해외 주주 역시 자본이 쏠리는 미국 증시 상장을 원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차등의결권으로 창업자의 경영권 보장을 해줘도 반드시 국내 증시를 선택할 것이란 보장이 없다는 지적이다. 대주주 엑시트(자금회수)를 위해 도피성 상장을 하는 기업의 경영권을 미리 보호해주는 모순이 발생할 수도 있다.

박상인 경제정의실천연합 정책위원장은 “미국 증시에 상장하는 IT 유니콘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홍콩 등 몇몇 증시도 차등의결권 주식을 보유한 기업의 상장을 허용했으나 결국 주요 기업은 미국에 상장했다”며 “이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선수가 국내 리그에서 뛰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과 같다. 차등의결권 주식을 허용하면 미국 증시에 갈 수 있는 기업이 한국 증시에 상장할 것이란 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별다른 혁신이 없는 기업에 경영권 보호 혜택을 줄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도입이 추진되는 차등의결권은 비상장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허용된다. 정부는 차등의결권 도입이 ‘벤처창업 활성화→벤처투자 확대’로 이어지는 순기능이 있다고 분석한다.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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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내에서 엄청난 외형 성장을 이뤄낸 K-유니콘의 경우 기술 혁신보다는 중개수수료를 받는 플랫폼 사업으로 몸집을 불린 케이스가 많다. 미국 스타트업 조사기관 CB인사이트가 2021년 1월 기준으로 발표한 K-유니콘 기업 11곳 중 5곳(쿠팡·야놀자·위메프·무신사·쏘카)은 O2O(온·오프라인 연계) 플랫폼이었다.

독일 기업에 인수되며 지금은 K-유니콘에서 제외됐지만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역시 플랫폼 사업을 토대로 공룡 기업으로 성장한 케이스다. 이중 쿠팡이나 우아한형제들 등은 입점 업체·상인과의 불공정 수수료 문제나 독과점 논란 등을 꾸준히 일으키기도 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쿠팡은 ‘물류 혁신’이라도 이뤘지만 다른 플랫폼 기업에게서 기술 혁신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이들의 경영권을 보호해 줄 차등의결권 도입의 이유가 국내 ‘벤처투자 활성화’라는 것은 명분이 약해 보이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벤처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생각보다 열악한 비상장 벤처기업은 차등의결권이 허용되더라도 갑자기 많은 자금을 유치할 수 있지 않을 것”이라며 “대부분의 소형 벤처기업은 정부 정책자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사실상 차등의결권 도입은 벤처기업 육성 측면보다는 이미 몸집이 커질대로 커진 유니콘의 국내 상장을 위한 미끼를 던져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